[살며 생각하며] 수황정의 비극
명나라는 말기에 이르면서 환관들의 발호와 부정부패로 사방에서 도적떼들이 들고 일어났다. 당시 원숭환(袁崇煥)은 명나라 최고의 명장이었다. 원숭환은 사르후 전투 이후 명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던 누르하치를 영원성 전투에서 패퇴시키고, 그의 아들인 홍타이지의 공격마저 막아내는 등 무너져 가던 명나라를 지탱하고 있었다. 원숭환은 후금의 홍타이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인물이었다. 홍타이지는 1629년 10월, 영원성과 산해관을 우회하여 베이징으로 침입했다. 원숭환의 허를 찌르고 곧바로 황성을 노린 기습작전이었다. 황성 포위 소식에 경악한 원숭환은 수천의 병력을 이끌고 베이징으로 달려와 베이징 부근에서 악전고투 끝에 후금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원숭환에게 반감을 품은 환관들이 황제에게 무고했다. 대학사 온체인은 “원숭환이 홍타이지와 내통하여 후금군을 끌어들였다”며 목을 치라고 상주했다. 평소 의심이 많고 대국을 볼 줄 올랐던 숭정제는 결국 홍타이지가 꾸민 반간계(反間計)를 덥석 물고 만다. 홍타이지는 황성에서 물러나면서 환관 두 명을 사로잡았는데 “원숭환이 베이징을 탈취하기로 후금과 밀약했다”는 소문을 흘린 뒤 이들을 풀어준다. 돌아온 환관들로부터 보고를 받은 숭정제는 대노했다. 원숭환은 베이징의 저잣거리에서 책형(磔刑)을 당했다. 기둥에 묶어 놓고 온몸의 살점을 발라내는 잔혹한 처형이었다. 〈명사(明史)〉의 사관은 이 대목에서 “숭정제는 스스로 장성을 허물어 나라의 멸망을 재촉했다”고 적었다. 숭정 17년(1644)은 중국 역사상 중요한 해였다. 3월 15일 숭정제의 집무실에 이자성으로부터 통첩이 날아들었다. “18일에 유주(幽州)에 이를 것임.” 유주란 베이징을 뜻하는 말이다. 이자성이 3일 후에 베이징을 유린하겠다는 협박장이었다. 남은 시간은 이제 3일밖에 없었다. 이자성의 반란군은 예정보다 빠른 3월 17일 베이징성 밑에 도착했다. 베이징성은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겨우 15만 명의 군사가 있었으나 그나마 노약자‧ 환자들이 대부분이어서 성벽 곳곳에 배치할 병력도 모자라는 실정이었다. 반란군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숭정제에게 가장 신임받던 조화순이 창의문을 열어젖히고 반란군을 맞아들였다. 밖에는 이자성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자성에게 항복한 환관 두훈이 조화순을 설득하여 성문을 열게 한 것이다. 반란군은 노도처럼 성 안으로 몰려들었다. 성 안으로 들어간 이자성의 반란군은 다른 성문을 열어젖히고 반란군을 맞아들였다. 반란군은 외성에서 내성을 무찌르고 다시 자금성에 육박했다. 반란군은 노도처럼 성 안으로 몰려들었다. 명 왕조의 운명은 이제 풍전등화와 같았다. 반란군이 성내에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숭정제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환관 왕승은을 데리고 자금성을 나와 만수산에 올라가 멀리서 베이징 시내를 살펴보았다. 베이징 내성의 9개 문밖 여러 곳에서 반란군들의 횃불이 붉게 타올랐고 우렁찬 환호 소리가 베이징 하늘 아래 메아리쳤다. 숭정제는 혼잣말로 뇌까렸다. “베이징이 벌써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숭정제는 중대결심을 했다. 자금성으로 돌아간 숭정제는 술을 가져오라 하여 한 잔, 두 잔… 연거푸 마셔댔다. 그는 이미 죽을 각오를 했으나 명나라의 황통이 끊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황태자와 영왕 정왕은 살려야겠다고 생각해 평민 차림으로 변장시켜 각각 그들의 외가인 주 씨와 전 씨 집에 피난시켰다. 세 황자들은 모두 나이가 어렸다. 이들 네 부자는 헤어질 때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세 아들을 궁 밖으로 피난시킨 숭정제는 황후와 후비들에게 자결하도록 명했다. 황후 주 씨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고, 후비 가운데서도 자결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숭정제는 할 일이 남아있었다. 황자들은 피난시켰으나 황녀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을 그대로 살려두면 반란군에게 욕을 당할 염려가 있었다. 장평공주는 15세의 아리따운 소녀였다. 그녀는 수령궁에 있었다. 숭정제는 칼을 빼 든 채 수령궁으로 들어갔다. “너는 무슨 죄로 짐의 딸로 태어나 꽃다운 나이에 이 같은 비운을 맞게 되었단 말이냐!” 탄식하면서 장평공주의 왼팔을 칼로 내리쳤다. 그리고 겨우 여섯 살 난 소인공주가 있는 소인전으로 들어가 딸을 칼로 찔렀다. 어린 소인공주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으나 장평공주는 상처를 입고 유혈이 낭자한 채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시녀들이 그녀를 부추겨 도망할 것을 권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부황께서 내게 죽음을 내리셨으니 내 어찌 감히 살기를 바라겠느냐. 또 도적들이 들어오면 반드시 나를 찾을 것이니 나는 숨을 곳이 없느니라.” 시녀들이 억지로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악몽 같은 18일이 지나고 19일 아침이 되자 숭정제는 친히 경종을 울려 중신들을 불렀으나 중신들의 모습은 비치지 않았다. 이제는 측근들로부터도 완전히 버림받은 것이다. 숭정제는 왕승은을 데리고 다시 만수산으로 올라갔다. 만수산에는 황제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수황정(壽皇亭)이 있었다. 숭정제는 이곳을 죽음의 장소로 택했다. 숭정제는 소복 차림에 왼발은 맨발, 오른발에는 붉은 신을 신었다. 관은 벗겨졌고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린 채 죽어 있었다. 그의 흰 옷깃에는 다음과 같은 유조가 씌어 있었다. “짐은 죽어 지하에 돌아간들 선제를 뵐 면목이 없다. 그래서 머리털로 얼굴을 가리고 죽는다. 도적들은 짐의 시신을 갈기갈기 찢어도 좋고 문관들을 모두 죽여도 좋지만, 다만 능침만은 허물지 말라. 백성들 한 사람이라도 상하지 말라.” 황제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세운 수황정에서 34세의 젊은 나이인 숭정제가 자결했다는 것은 얄궂은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이 비극의 수황정. 황제 곁에서 순사한 것은 오직 왕승은 한 사람뿐이었다. 명나라는 16대 277년 만에 역사의 막을 내렸다. 숭정제의 최후는 처절했다. 하지만 그가 망국과 죽음을 앞두고 보였던 비장한 태도를 평소 정치를 할 때 발휘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특히 신료들을 제대로 보는 안목이 있었다면 그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숭정제의 최후를 기록한 〈명사〉 사관의 평가는 흥미롭다. “황제는 재위 17년 동안 음악과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고 고심하면서 국사에 힘쓰고 정치에 마음을 다했다. 조정에 나아가 크게 탄식하며 비상한 인재를 얻고 싶다고 했지만, 제대로 된 인재를 쓰지 못해 정사는 더욱 망가졌다. 이에 다시 간사한 환관들을 신임하여 요직에 배치함으로써 행동과 조치가 마땅함을 잃고 어그러졌다. 복이 다하고 운이 옮겨가 몸이 화변(禍變)에 휘말렸으니 어찌 시운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국가의 흥망은 제대로 된 지도자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다.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죽어나는 것은 백성이다. 숭정제의 비극적인 최후를 보면서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두 전직(前職)이 한 달 간격으로 세상을 뜨면서 문 대통령 전임자는 감옥 속 두 전임자만 남았다.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12명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내각책임제 속 대통령과 ‘징검다리 대통령’과 문 대통령을 제외한 나머지 9명은 모두 불행했다. 살해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망명길에 올랐다. 본인과 자식들·형·동생·처남·동서까지 감옥에 갔다. 남미나 아프리카 국가에도 없는 대통령 역사다. 이번에는 대통령다운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 ‘감옥에 가지 않을 후보’가 누군가를 제1의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나는 대통령을 뽑는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정직성을 꼽는다. 정직성은 단순히 거짓이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에는 그런 대통령을 보고 싶다. 비극 베이징성은 무방비 대통령 전임자 베이징 내성